[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섬·망(望)> 영화 시작됐는데 화면 정지… 오해 말고 잠깐 기다리세요
김상목
‘고독사’, ‘무연사’는 이제 더 이상 남의 동네 일이 아니라 바로 한국 사회의 문제가 된 지 오래다. 그동안은 노인세대에게 국한된 사안이라 여겨왔지만, 이제는 전 연령대가 속한 문제가 되고 말았다. 세대를 초월해 사회 전반의 변화가 전통적 가족과 마을 공동체에서 개별화되면서 당연히 오고야 말 현상이긴 해도, 뭐든 ‘T.O.P’ 급으로 찍어내는 한국 실정이다 보니 그 급격한 증가와 심각한 수준은 아무리 우려해도 지나치지 않은 사회적 위협이 되어간다.
독립예술영화는 항상 사회문제에 예리한 시야로 천착해 왔다. 고독사 문제 역시 예외는 아니다. 고령층의 소외부터 청년세대의 고립까지 사회적 추세에 발맞춰 적지 않은 작업을 선보여 왔다. 하지만 대개 그 표현 방식은 시사 고발의 형태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뉴스 르포 혹은 실제 일어난 사건의 극화 위주 둘 중 하나를 택하곤 했다. 사실을 전달하기 위한 전형적 구성이다.
근래 들어 양적 축적과 함께 좀 더 다양한 변주가 일어나는 도상이다. 지극히 사회적 현실 쟁점이지만 오히려 실험적인 접근법이나 실사가 아니라 애니메이션 기법과 특수효과 등을 활용해 더 사안의 깊이와 슬픔의 감정을 극대화하려는 흥미로운 시도가 근래 곳곳에서 포착된다. 본 작품 <섬·망(望)>은 그런 흥미로운 도전의 최전선을 점하는 작업이다.
멈춰버린 세계를 부유하는 주인공의 여정
분명히 영화가 시작됐는데, 한참 동안 화면에는 특별한 윤곽이 떠오르지 않는다. 성질 급한 관객이라면 영사 사고를 확인하고자 자리에서 일어나 영사실을 찾을 법한 순간이다. 그런 조바심을 억누르고 조금 더 기다려본다. 한 여성의 얼굴이 스크린을 채운다. 흐느끼는 듯 소리가 스며들고, 누군가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찾는 목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도무지 영화 속 상황을 파악할 수 없다. 무엇을 전하려는 걸까.
슬픈 표정을 한 젊은 여성이 어두운 골방에서 나와 인적 드문 어느 거리를 떠돈다. 여성은 반려견과 함께다. 거리에서 몇 명의 타인과 마주치지만, 그들은 모두 정물이 된 것처럼 우두커니 멈춰 있거나 공허한 시선으로 부유할 뿐이다. 마치 세계가 고장 난 장난감처럼 태엽이 멈춰버린 모양새다. 간간이 그들의 사연이 귓가에 울린다. 스스로 생을 중단하기 위해 독극물을 마시거나, 바닷속에 제 발로 들어가려는 이들 각자의 비극이 소개된다. 그러나 개별의 사연은 달리 메아리를 맞이하지 못한다.
‘은애’라는 이름이 확인된 여성은 강아지를 데리고 거리를 벗어나 다시 야산과 들판을 정처 없이 떠돈다. 관객은 특정한 경로를 파악하기 힘들다. 실제로 여성과 강아지가 정해진 길을 걷는 게 아니라 마치 유령이 홀연히 출몰하는 움직임을 취하기 때문이다. 은애는 순간이동을 하듯 다시 어두컴컴한 실내에 웅크렸다가 다음 순간 이름 모를 폐허에 와 있다. 마치 신기루를 대하듯 그는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고, 자신을 기다리는 타인들과 만나곤 한다. 다만 뭐 하나 명쾌한 풀이는 제시되지 않는다.
그렇게 마치 종말 이후의 세계처럼 멈춰버린 풍경 속을 떠돌던 은애는 애타게 서로를 찾던 어릴 때 헤어진 언니 ‘미애’와 마주한다. 이것은 꿈인지 현실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지만, 오랫동안 유령의 움직임처럼 보이던 은애의 동작이 이제야 생기를 찾고 평범하게 드러난다. 이게 과연 현실일까? 답은 그저 가만히 화면의 움직임을 응시하는 기다림 끝에 찾을 수 있다.
고독사 당사자가 품었을 꿈의 심연 속으로
감독은 어느 날 문득 발견한 신문 사회면 기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고시원에서 외롭게 살던 여성은 위급 상태로 발견돼 병원에 후송된다. 혼수상태에서 잠깐 의식을 찾은 여성은 ‘카스테라’가 먹고 싶다 하고 마지막 소원은 다행히 이뤄진다.
한 조각의 카스테라를 먹은 여성은 곧 숨을 거뒀고, (기사를 접한 감독처럼) 못내 마음이 쓰였던 한 경찰이 수소문 끝에 해외에 거주하던 여성의 언니를 찾아 동생의 죽음을 전했다. 언니는 북받쳐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영화는 그 여성의 남모를 사연을 재연하는 기획으로 출발해 원래의 의도대로 완성된다.
영화화 작업은 절대로 만만했을 리 없다. 영화 속 ‘은애’가 된 그 여성의 생전 사연은 알 길이 없는 노릇이다. 짧은 미디어 보도 단신 외에 심층 취재도 달리 파악된 게 없다. 그렇다고 그저 이름 없는 타인의 비극을 소재주의로만 활용하고픈 생각도 없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기승전결 서사로 이 영화를 전개할 방도가 없고, 애초 그럴 의도도 없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어떤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까? 그 대답으로 감독은 무척 기이하고 동떨어진 풍경을 관객 앞에 내놓았다.
국문 제목과 영문 제목 모두 공통적으로 ‘섬’을 제시어로 삼았다. 영화 속 표류하듯 출현했다가 사라지는 이들이 곧 이 세계의 ‘섬’과 ‘섬’인 셈이다. 절해고도처럼 망망대해에서 서로 만날 수 없는 존재들이 애타게 대답 없는 메아리를 외치며 하염없이 누군가의 응답을 기다린다.
우리가 흔히 갖는 편견, 사회에 적응할 의지가 없거나 타인에게 용기를 내어 문을 두드리지 않는 이들이라 치부하는 타인들의 심정을 고스란히 표현하려는 것처럼 다가온다. 개별이 품은 깊고 깊은 상처, 그로 인해 촉발된 위태로운 상태를 공감각적으로 관객의 시선에 구현하려는 감독의 심정이 전해지기 시작한다.
그런 꿈의 차원을 표현하고자 영화는 초현실적 이미지를 동원한다. 154분이란 만만하지 않은 상영시간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구성하는 장면은 놀라울 만큼 적다. 거의 단편영화 장면 숫자에 불과해 보인다. 그렇다고 예술영화 작가들이 흔히 구사하는 롱-테이크 기법과도 분명히 다른 형태다. 인물들의 비현실적으로 여겨지는 동작에 그 비밀이 숨어 있다. 일부러 고속 촬영기법을 통해 역설적으로 느린 속도감을 조성한 것이다. 이 번거로운 과정을 통해 일상적 풍경과 동떨어진 이미지, 그야말로 ‘(무)의식의 흐름’을 화면에 개방할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관객은 이 영화가 고시원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이한 당사자가 최후가 임박했을 때 꿈을 꾼다면 어떤 것이었을까 상상으로 채워진 것임을 간파하게 된다.
물리적·정신적으로 고립된 공간에서 햇볕도 물도 얻지 못한 채 말라비틀어진 화분처럼 고사해가던 주인공의 심정은 어땠을까 상상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면 이런 풍경일까? 뇌내망상으로나마 그리운 육친과 재회하고 문득 간절히 먹고 싶은 것을 맛본다. 숨쉬기에도 답답하던 고시원을 벗어나 탁 트인 자연을 접하는 환상은 얼마나 그가 목말라 했던 풍경일까? 아무리 꿈을 꾼들 벗어날 수 없는 질곡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교차하는 형세다.
이름을 잃어버린 이들을 기억하는 방법
<섬·망(望)>은 글로 풀어 설명하기 불가능에 가까운 영화다. 근대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급격하게 변화해온 영화예술은 사진이 이룩한 시각적 경이를 활동사진에서 출발해 다음 차원으로 승화시켰다. 고작 100여 년 남짓 시간 동안 영화는 수많은 이미지의 모험을 단행해 왔다. 그 본령이 시각 이미지에 있기에 이를 2차원 텍스트로 가두기란 원래부터 성립될 수 없는 불가능한 도전일 수밖에 없다.
그나마 산문/소설 형태와 구조적으로 닮은 서사 구조라면 일정하게 비교할 수 있지만, 본 작품은 거대한 추상화 혹은 운문의 리듬을 지녔기에 글로 설명하는 건 포기하면 편하다. 그렇다면 무엇을 언급할 수 있을까?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몽롱한 꿈의 환상이 파편적으로 거듭되기에 이질감에 몽롱해지거나 혹은 폐소공포증에 시달릴지도 모른다. 탈출할 수 없는 꿈의 미로에 갇힌 것처럼 말이다. 그러다 후반 들어 거의 처음으로 익숙한 일상적 리듬이 복원되는 해변 장면, 은애가 언니 미애와 마침내 만나는 찰나에 안도의 긴 숨을 내뿜을 법하다.
이윽고 해당 장면이 어떤 귀결로 향할지 깨닫는 순간, 결국엔 현실에 실재했던 이름 모를 여성의 운명처럼 영화 속 주인공이 처할 극한의 비극성을 지켜봐야만 하다. 감독의 의도가 바로 극장 바깥의 세계에서 우리가 영화 속 주인공에게 품게 되듯 동정과 관심을 간직하기 바람이라 피할 도리가 없다. 사실 이 영화가 완성되는 지점이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가 미디어 단신의 사회적 비극을 접할 때, 그저 인스턴트 감성으로만 스치고 금방 망각하는 답습을 멈추길 바라는 소망이 이 영화를 만든 이들에게서 관객 각자에게 전해지길 갈망하는 작업이다.
무심코 영화를 접하면 마치 다른 우주 또는 평행 세계의 숨은 입구로 발들인 기분이 될 테다. 속도와 중력, 전개 모두 우리의 고정관념과 동떨어진 형태다. 인물들의 지극히 드문 대사가 굳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만국 공통의 감정, 타인의 고통을 향한 순수한 측은지심과 연민의 정조로 가득 차 있다.
독립영화 역시 피할 수 없는 ‘공식’과 ‘답습’이 아닌 방식으로, 배우의 연기를 오케스트라 악기처럼 조합하고, 빛과 그림자. 불과 물의 대비로 심리를 구현한다. 정중동의 다층적 속도감과 (‘로토스코핑’ 기법 등) 튀지 않지만 공들인 특수효과 장치까지, 백일몽 왕국 속 림보의 질감을 오롯이 구현하는 낯설지만 흥미로운 작업이다.
개별의 죽음과 비극이 그저 숫자로만, 익명성으로만 끝나지 않아야 한다는 감독의 연민이 워낙 깊은 까닭에, 그가 완성한 영화는 소외된 우리 사회의 무명 구성원 사연은 어떤 것일까 참으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그 결과는 누구도 기억하지 않을 비극의 당사자를 스크린 가득 펼친 ‘Daydream Nation’의 주인공으로 부활하는 위업에 닿는다.
덧 : 영화는 개봉 한 달 여를 지났지만 전국적으로 300여 명의 관객에 그친 상황이다. 정규 배급사 대신 ‘자주 개봉’으로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는 관에서 드문드문 상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을 극장에서 체험한다면, 영화와 실제가 맞닿는 초월을 목격한다면, 감독이 왜 기도하는 마음으로 <섬·망(望)>에 매달렸는지 온전히 마음 깊숙이 전해질 테다. 틀림없는 일이다.
출처 :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섬·망(望)> 영화 시작됐는데 화면 정지… 오해 말고 잠깐 기다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