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의 작은 이야기들, 한국영화의 새 길
정민아 | 영화평론가
올해로 45회째를 맞이하는 ‘영평상’은 한국영화평론가협회에서 주관하는, 영화평론가들이 시상하는 영화상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영화평론가들이 뽑고 수상하기에 여타 대중적인 영화상과 차별화된 시선을 가지고 결과를 발표한다. 작품의 미학성이 가장 큰 고려 요소로, 영화형식에 대한 독창성을 가졌는지, 내용적으로 시대정신을 잘 구현하고 있는지 등의 암묵적인 평가 기준이 있다. 2024년 <괴인>(이정홍), 2023년 <다음 소희>(정주리)에 이어 이번에도 <3학년 2학기>(이란희)를 작품상으로 뽑으며, 흥행이나 대중적 관심도를 떠나 인디정신으로 미학적 성취를 중심에 두는 상의 방향성을 분명히 하고 있다.
2025년 영화평론가들이 뽑은 ‘영평상 10선’에 다음 영화들이 이름을 올렸다. <3670>(박준호), <3학년 2학기>, <봄밤>(강미자), <섬.망(望)>(박순리), <아침바다 갈매기는>(박이웅), <어쩔수가없다>(박찬욱), <얼굴>(연상호), <여름이 지나가면>(장병기), <승부>(김형주), <홍이>(황슬기) 등이다.
위 영화들은 부문상도 수상하였는데, <3학년 2학기>의 이란희 감독에게 각본상, <3670>의 박준호 감독에게 신인감독상과 조유현에게 신인남우상, <섬.망(望)>의 김정민우에게 촬영상과 음악상, <아침바다 갈매기는>의 홍초롱에게 조명상, <어쩔수가없다>의 박희순에게 남우조연상, <얼굴>의 박정민에게 남우주연상, <여름이 지나가면>의 장병기 감독에게 감독상, <홍이>의 장선에게 여우주연상을 수여하며, 위 영화들의 공을 겹으로 치하했다.
2025년 한국영화산업은 팬데믹 이후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상황을 타개하지 못하고 빠른 속도로 재편되고 있다. 영평 10선은 비평 입장에서 한국영화 지형도를 파악하게 하는 중요한 좌표로 기능해 왔다. 2024년 10월에서 2025년 9월까지 개봉한 한국영화를 대상으로 선정한 영평 10선에는 어떤 일정한 문제의식이 드러난다.
스크린은 작아지고, 플랫폼은 커지고
2025년 최고 흥행작은 560만 관객을 모은 <좀비딸> 이며, 300만을 넘은 영화는 <야당>(330만)까지 고작 2편이다. 베니스영화제 공개부터 오스카를 노리며 올해 최고의 화제작인 <어쩔수가없다>도 290만 명 관객으로 300만의 고지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보스>, <하얼빈>, <승부>, <하이파이브> 같은 상대적으로 큰 영화들도 손익분기점을 넘기기 어려우며, 화제성 또한 예전에 못 미친다.
현재 영상 콘텐츠는 수많은 플랫폼을 통해 소비자와 만나면서, 과거 영화관이 플랫폼 중심이던 시대는 멀어졌다. 극장 산업의 부진은 두 가지 요인에서 나타난다. 첫째, 팬데믹 이후 변한 관객성 문제다. 팬데믹 기간 동안 OTT를 통해 장르성 강한 영상콘텐츠를 쉽게 접하다 보니 관객이 굳이 극장으로 향하지 않는다. 둘째, 영화관이라는 플랫폼이 역사적 시효를 다하고 있는듯하다. 이제 영화라는 단일 포맷은 가능하지 않고, 영상 개념으로 재정의되어야 한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OTT 콘텐츠인가, 애니메이션 영화인가, 케이팝의 스핀오프 산물인가, 뮤지컬 영상인가. 그 모든 것이 합쳐진 것이 <케데헌>이라는 문화콘텐츠라는 점에서 영화는 존재에 대한 고민과 함께 다시 정의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환경을 위기라고 보는 시각이 대세다. 그러나 극장 산업의 필연적 쇠퇴 속에서 유행에 따라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 진짜 영화를 신중하게 고르는 관람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2025년에는 독립예술영화가 작품성이나 관객 동원 면에서 커다란 성과를 낸 원년이 된 것 같다. <퇴마록>(김동철), <킹 오브 킹스>(장성호), <연의 편지>(김용환) 등의 애니메이션이 마니아를 극장으로 유인했고, 2025년 10월 개봉작이라 올해 영평상에는 포함되지 않은 독립영화 <세계의 주인>(윤가은)이 관객 10만 명을 넘어섰다.
최근 정치 진영 관객을 끌어모으는 영화들이 꾸준하게 성공한 점이 두드러지지만, 작품성을 갖춘 독립예술영화가 긴 호흡으로 진정한 씨네필을 만 명 이상 끌어모으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닌 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쩔수가없다>와 <승부> 두 편을 빼고 모두 독립영화가 영평 10선에 오른 것은 산업적으로 고전 중인 한국영화계에서 진정한 회생의 기운을 독립영화에서 찾을 수 있음을 내비치는 것이다.
사회적 소수자를 포착하는 리얼리즘
사회적 소수자 혹은 노동계급을 주인공으로 삼으면서 현실의 사회문제를 진지한 리얼리즘 언어로 깊이 있게 다루는 작품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특성화고 현장 실습생의 사회진출 현실을 다루는 <3학년 2학기>, 채무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미혼여성과 치매 어머니와의 관계를 그리는 <홍이>, 탈북민 퀴어 청년의 남한 생존기 <3670>, 어촌 노인과 이주 여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치는 <아침바다 갈매기는>, 굶주린 채 죽음과 마주하는 여성 청년의 절망을 실험적인 언어로 다루는 <섬.망(望)>,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 중년 가장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그리는 <어쩔수가없다>, 시각장애인 도장장인과 청계천 피복노동자의 노동 세계를 그리는 <얼굴>, 어른들과 사회의 돌봄 없이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고아 형제를 그리는 <여름이 지나가면> 등 거의 모든 선정작이 노동, 빈곤, 소외의 스펙트럼을 깊이 있게 다룬다.
특히 노동영화라고 불리는 범주에 속하는 영화가 많다. <3학년 2학기>, <아침바다 갈매기는>, <어쩔수가없다>, <얼굴>, <홍이>가 여기에 포함된다. 자본주의 경쟁체제의 압력 속에서 흔들리는 오늘의 한국사회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이 영화들은 매우 구체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내면과 관계에 초점을 두는 심리 드라마
동시에 이 영화들은 대규모 스펙터클보다는 인물의 심리와 복잡한 관계에 집중한다. <봄밤>은 연인의 관계와 비극을 간직한 인물 내면의 슬픔을 화면에 담으려고 한다. <승부>는 스승과 제자의 내적 갈등이 외부에서 일어나는 사건보다 더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얼굴>은 오해와 기만이 초래한 거대한 비극을, <여름이 지나가면>은 소년들의 대비되는 두 세계를 다룸으로써 선과 악의 주관성에 대해 질문한다.
<섬.망(望)>은 죽음에 마주한 한 청년이 겪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오가는 이미지를 통해 인간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한다. 관찰자적이고 객관적인 표현 양식을 철저히 따르는 <3학년 2학기>의 건조한 재현 스타일은 취업을 준비하는 고3 학생의 내면을 오히려 열심히 들여다보도록 이끈다.
모녀 사이의 온도를 세밀하게 포착하는 <홍이>, 탈북 청년의 또래집단 입성 노력과 그에 대비되는 고독함이 예리하게 담기는 <3670>, 젊은 이웃 어부를 위해 침묵과 묵인을 택하는 유별난 성격의 노인을 긍정하게 되는 <아침바다 갈매기는> 등이다. 이 열 편의 영화 모두 이야기가 끝난 뒤, 한참 동안 자리에 앉아 주인공의 표정과 그의 진짜 속마음을 곱씹어 보게 한다. 청소년, 사회 초년생, 청년, 노인, 이주자, 탈북자, 육체노동자, 장애인 등 영평 10선 영화들은 사회 주변부에서 생존을 위해 애쓰는 이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그들의 진실한 모습을 화면에 그려낸다.
감각이 움직이는 형식 실험
형식 실험 또한 뚜렷하다. 이야기의 힘은 시청각 언어의 새로움을 통해 더 강력한 무기가 되어 관객과 소통한다. 영평 10선은 동시대성, 시대정신, 독창성, 새로움을 중요하게 고려하여 선정된다. 올해 10선 영화들은 도파민 중독에 시달리는 현대인과 미디어 현실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화려한 스펙터클과 스피디한 감각으로 이목을 집중시키는 전략을 쓰지 않는다. 대신, 여백 있는 구성, 정적인 카메라, 인위적이지 않은 커트, 절제된 대사, 현장 사운드의 활용, 침묵의 리듬 등 슬로우 시네마 양식과 미니멀리즘 구성을 공유한다.
<3학년 2학기>와 <섬.망(望)>, <봄밤>은 아마도 그 정점에 있는 작품일 것이다. <홍이>, <여름이 지나가면>도 이 계열로서 요란한 움직임과 빠른 전개보다, 조용하고 깊이 있으며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과 풍경 속에서 삶의 의미를 성찰하게 하는 거대한 힘을 발휘한다.
특히 <섬.망(望)>은 마케팅에 공을 들이지 않고 미디어의 조명도 받지 않은 채, 고시원에서 쓸쓸하게 사망해야 했던 실존 인물의 넋을 기리는 방식으로 조용하고 길게 지역을 중심으로 상영하였다. 우연히도 찾아낸 이 걸작은 천천히 고요하게 흘러가는 촬영과 음악, 인물들의 조용하고 느린 움직임 속에서 죽음의 공포와 삶에 대한 애착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어둠 속에서 느린 시선과 미세한 숨결만으로 감정을 움직이는 경험은 극장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극장이 무용지물이 되어가고 있는 지금, 극장의 존재 이유를 역설적으로 되짚는, 아직은 유명하지 않은 걸작이다. 이 영화가 언젠가 많은 이들에 의해 재발견되길 소망한다.
한국적 일상성의 재해석, 로컬의 촉감
로컬의 감각도 소중하다. 10선 영화들에서는 지역 소도시, 공장, 학교, 바다, 골목, 동네와 집 등 익숙한 공간을 배경으로 가족, 경제, 정체성, 친구 등의 상황을 그린다. 도시의 빌딩 숲이 아니라 시골 공간, 중심부가 아닌 근교 생활자들, 기계가 돌아가는 공장, 소수자들의 유흥 공간 등 이 영화들은 동시대 한국사회의 구석에서 스민 정서적 습기를 가득 머금는다. 영화 속 이미지는 익숙한 장소이지만 폐쇄적 공간처럼 그려지며 현실의 고단한 삶이 빼곡히 채워진다. 그리고 교훈보다는 체험과 공감을 끌어내는 이야기와 스타일을 추구한다. 그만큼 관객은 영화가 주는 떨림을 따라가며 각자의 현실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과장 없이 사건을 관조적으로 그리고, 속사포 같은 대사의 향연을 벗어나 말수를 최대한 누른 채 힘을 뺀 현실적 인물 묘사 속에서 한국적 일상성의 정서가 살아난다. 이때 감정은 폭발하지 않고 미세하게 진동하며, 미묘하게 흔들리는 순간을 포착하여 영화보기의 즐거움, 영화가 끝난 후 일상으로 돌아갈 때의 벅찬 감동으로 이끈다. 돈, 경쟁, 돌봄, 가족, 학업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모두가 겪는다는 평범한 사실 앞에서 영화들은 사소하지만 의미 있는 순간에 집중한다.
이렇게 모인 열 편의 영화는 단일한 흐름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감각과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새로운 지층을 형성한다. 중심부가 약해진 자리에서 작은 영화들이 만든 균열은 위기와 갱신의 경계에 서 있다. 플랫폼 시대의 한국영화는 더 작고, 더 느리고, 더 일상적인 감각으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 2025년 영평상 10선은 이 변화를 가장 또렷하게 보여주는 기록이며, 산업이 흔들릴수록 비평이 포착하는 감각의 방향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확인시킨다.
올해 선정작들은 사회적 소수자와 노동계급의 현실을 깊이 파고들고, 인물의 내면과 관계의 미세한 떨림을 붙잡으며, 슬로우 시네마와 미니멀리즘의 형식을 재해석한다. 극장은 작아지고 플랫폼은 커졌지만, 영화는 오히려 더 예민해지고 더 섬세해졌다.
주변부의 삶, 로컬의 촉감, 일상의 습도 같은 작은 요소들이 새로운 서사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이에 비평은 그 미세한 변화를 정확하게 읽어내고자 한다. 이 열 편은 산업적 축소의 시대에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생존하고, 어떤 감각으로 새로운 미래를 모색하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지도다.
어쩌면 이 조용한 영화들이 쌓아 올린 감각과 세계가 한국영화의 다음 장을 여는 첫 문장이 될지도 모른다. 현실의 다양한 면모와 소수자의 삶, 개인의 내면을 깊이 있게 탐구하는 이 영화들을 보고 있으면, 한국영화는 어쩐지 다시 한번 뉴웨이브의 르네상스를 맞이하려는 문턱에 서 있는듯하다. 산업은 위축됐지만, 감각은 더 깊어졌고, 영화의 폭은 다시 넓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쇠퇴의 징후가 아니라, 새로운 감각과 윤리가 만들어 내는 조용한 도전이자 반격이다.
그리고 이 반격은 어쩌면 한국영화가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 이미 답을 제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