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승의 시네마 크리티크] <섬.망(望)>이 지나온 시간을 바라보는 법
김현승(영화평론가)
어떤 비극은 인간을 거대한 늪 속으로 끌어내린다. 앞으로 나아가야 함을 알면서도, 과거에 얽매인 채 허우적대는 우리네 처지는 가엽고도 애처롭다. 그리운 이의 사진 한 장, 따스한 해피엔딩이 반겨주는 영화관은 현실을 잠시 잊기 위한 훌륭한 피난처가 된다. 그러나 과거를 끊임없이 되돌아보는 이 행위가 진정으로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박순리 감독의 <섬.망(望)>은 바로 이 지점에서 죽음과 이미지에 관한 사유를 독특한 시간 감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영화는 절망이 서린 주인공 은애(이은 扮)의 얼굴로 막을 올린다. 숨결이 닿을 듯한 클로즈업이 한참 동안 이어지지만, 아무런 부연 설명도 없이 암전이 찾아온다. 곧 부조화된 음향이 디제시스 내부로 침투하고, 텅 빈 극장을 향해 걸어가는 은애의 모습이 뒤를 잇는다. 스크린 속에서는 80년대를 풍미한 청춘 스타의 무대가 슬로모션으로 상영 중이다. 그러나 무표정한 은애의 얼굴 탓일까, 밝은 에너지로 가득한 춤사위에도 알 수 없는 서글픔이 새어 나온다. 롤랑 바르트의 사진론을 경유한다면, 우리는 이 기묘한 영상이 불러일으키는 센치한 감성을 ‘시간’과 엮어낼 수 있다. 바르트가 말했듯, 사진의 본질은 ‘존재 증명’이자 동시에 ‘부재 증명(not anymore)’이다. 결국 우리를 덮친 상실감은 ‘찬란한 과거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냉혹한 사실에서 비롯된다. <섬.망(望)> 전반에 자리 잡은 ‘느림의 미학’을 고려한다면, 폐관을 앞둔 극장에 애정 어린 작별을 고하던 <안녕, 용문객잔>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카메라는 곧 은애의 눈을 클로즈업하며, 영화라는 매체를 둘러싼 시선과 시간에 대한 사유의 공간을 본격적으로 열어젖힌다.
영화관을 나온 은애는 영문도 모른 채 사라진 언니의 기억 속을 방황하기 시작한다. “하루가 있고, 그것을 살고 또 그것을 죽고.” 언니를 향한 기억 속에는 두 사람 외에도 은애의 삶을 스쳐 간 이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죽음을 맞이하고, 동상처럼 굳어간 자들이다. 은애를 따라 도로 위를 유영하던 카메라는 그 자유로운 움직임 위에 각각의 증언을 시의 질감으로 수놓는다. 이처럼 <섬.망(望)>은 마술적인 카메라의 몸짓만으로 낯선 시간 감각을 성공적으로 구현해 낸다. 잠에서 깨어난 은애가 지금까지의 모든 장면이 꿈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조차, 그 꿈의 감각은 너무도 강렬하여 현실의 감각이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작품의 한가운데에 배치된 한 장면은 <섬.망(望)>이 구현하고자 한 ‘영화의 시간성’을 다시금 상기한다. 과거의 망령을 피해 타지로 도피한 은애가 함께 사는 언니와 평화로운 시간을 보낸다. 카메라는 창문 밖에서 식사하는 두 사람을 지켜보는데, 창문을 비롯한 프레임 속에 갇힌 그들의 모습은 마치 무성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다가온다. 이후 바닷가에서 펼쳐지는 두 번째 꿈 장면. 해변을 걷던 은애가 카메라를 향해 손을 내밀고, 갑자기 나타난 어린 시절의 은애가 그 손을 맞잡는다. 이때 관객의 시선이 어린 은애의 시선으로 전환되며, 우리는 영화를 보는 행위 자체가 과거와 현재, 두 시간선을 넘나드는 경험임을 직감한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은애가 기억의 바다를 헤엄치듯, 우리는 영화를 통해 이미 지나가 버린, 결코 돌아올 수 없는 세계를 바라본다. 이것이 <섬.망(望)>이 영화관의 감각을 작품 내부로 끌어들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는 안다. 고통도 열매처럼 여물어야 한다는 것을.” 한없이 과거를 맴돌던 은애는 마침내 죽음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 끊임없이 과거로 투신하던 그녀가 드디어 현재로 나아갈 힘을 얻은 것일까. 그러나 눈부신 윤슬 아래서 피크닉을 즐기던 순간, ‘언니’가 동상처럼 굳어가며 은애의 ‘현실’이 갑작스럽게 무너져 내린다. 실제 고독사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는 점에서 이와 같이 비정한 결말은 이해가 가지만, 그 쓰라림은 지독할 정도로 깊다. 영화는 결국 고독사 현장을 청소하는 두 남성이 삶에 사그라든 영혼들을 조용히 애도하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픽션의 힘은 결코 현실을 향할 수 없는 것일까? 그러나 <섬.망(望)>은 아픔에 잠식된 인간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는다. 다만 어떤 비극이, 영화가 건네는 위로보다 조금 더 컸을 뿐이다. 영화는 사그라든 영혼들을 애도하면서도, 현재가 과거를 바라보는 행위를 거듭하며 영화, 더 나아가 예술이 건네는 희망의 끈을 내려놓지 않는다. <섬.망(望)>은 또 다른 층위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현실의 관객에게 말을 건넨다. 과거를 꾸준히 돌아볼 것, 그리고 되도록 무너지지 말 것. 진실을 자각하고도 결국 다시 극장을 찾을 수밖에 없는, 순진하게도 아직 픽션의 힘을 믿는 이 시대의 수많은 ‘세실리아’(<카이로의 붉은 장미>)를 위해.